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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한국의 시티 록의 대명사 “윤수일”

오늘은 우리나라 1970~80년대에 크게 인기를 얻었던 추억의 가수 윤수일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시티 록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으면서 미국의 빌리 조엘과 비견되곤 하면서 ‘한국의 빌리 조엘’이라는 닉네임도 있었던 윤수일의 음악 행로를 알아본다.

1955년 울산 출신인 윤수일은 주한미군 조종사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무남독녀 외동아들로 태어나지만 아버지가 비행사고로 사망하면서 어머니가 윤 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여 그가 윤 씨 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의 계부는 그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잘 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혼혈에 배타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인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윤수일은 일찌감치 예능 쪽으로 진로를 잡게 된다. 마침 그의 재능을 알아본 고교 음악 선생님의 추천이 그를 음악인의 길로 이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76년 신중현 사단의 록그룹 <골든 그레입스>에 가입하여 리드싱어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 그룹은 함정필⦁함중아 형제가 주축이 된 6인조 혼혈아 싸이키델릭 록밴드였다.(함정필⦁함중아 형제만 혼혈아 아님)
이 그룹에서 같이 활동하던 함정필과 함중아 형제가 음악적 견해차이로 함중아가 탈퇴하면서 그 자리에 윤수일이 리드싱어로 가입이 된 것이었다.(논란이 있지만 나무위키 내용 참조)
 

윤수일과 솜사탕 1집앨범

 

1977년 장충체육관에서 록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가 열리게 된다.
윤수일이 속한 그룹도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 안타프로덕션의 사장이자 그룹 영사운드 출신의 작곡가인 안치행의 눈에 띄면서 음반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이 당시 원래 밴드명 대신 윤수일을 중심으로 한 <윤수일과 솜사탕>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이 발매되는 데다가 9곡의 수록곡 중 리더 함정필이 만든 8곡의 싸이키델릭 곡과 안치행이 만든 트로트 고고의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수록된 『 윤수일과 솜사탕 1집 』이 그룹의 내분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윤수일 데뷔곡은 “사랑만은 않겠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d7REuWCOWGU

 
싸이키델릭 록을 고수하고자 했던 리더 함정필 측과 트로트 고고라도 대중이 사랑하는 곡을 하자는 안치행과 윤수일 측이 대립하면서 결국은 윤수일이 그룹을 탈퇴하여 솔로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룹의 앨범으로 발표한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엄청난 히트를 하고 있음에도 음악적 사생결단이 작용한 것이 되는 셈이다.

이후 안치행은 그룹이 아닌 윤수일의 솔로 앨범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1978년 5월에는 윤수일 솔로 2집(솔로 1집은 윤수일과 솜사탕의 앨범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발표하고 수록곡 ‘갈대’를 히트시킨다.
이로써 윤수일은 데뷔하자마자 1978년 연말 mbc 최고인가가요상과 신인가수상을, kbs에서도 10대 가수상을, TBC에서도 7대 가수상을 수상하며 스타가 된다.

1978년 7월의 『 추억의 노래 』에 이어 1979년 8월의 『 윤수일 4집 』에서는 ‘나나’, 1980년 3월 5집에서는 ‘유랑자’를 히트시키게 되었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연타석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윤수일은 당시 최고의 전성기 시절을 보낸다.
데뷔는 그룹으로 시작했지만 솔로로 더욱 더 빛을 발한 스타가수 윤수일이었다.
물론 음반 프로듀서 안치행의 손길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윤수일밴드 2집

 

1981년 윤수일은 자신의 이름을 건 밴드 윤수일 밴드를 결성하면서 그동안 해왔던 트로트 고고를 벗어나 자신만의 록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그동안 키워온 작곡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1981년 4월 윤수일 밴드 1집(윤수일의 6집으로 보기도 함)을 발표한다.

이 앨범의 첫 히트곡이 바로 ‘제2의 고향’이었다.
이어서 후속곡으로 멋진 기타 리프가 들어가는 ‘떠나지마’까지 히트를 하면서 그룹음악으로도 대성공하게 되는 윤수일은 1982년 6월 윤수일 밴드 2집을 야심 차게 발표하게 된다.

바로 윤수일 밴드 2집에서 발표되었던 곡이 그 유명한 명곡 “아파트”였다.
지금도 윤수일 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바로 그 곡이다.
한국적 시티 록이 본격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게되는 순간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jXdlMk_3_A

 
 
당시는 잠실벌에 막 아파트가 들어서는 때였고, 군에 갔다가 돌아오니 여친은 연락도 없이 이민을 가버렸고, 그저 아파트 초인종만 누르다 돌아와야 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윤수일이 노래로 만든 곡이다.
노래는 흥겹지만 아픔이 담겨있는 곡이다.

1984년 4월에는 윤수일 밴드 3집에서 ‘아름다워’를 히트시킨다.
곡 제목 때문이었는지 그는 매년 미스코리아 대회에 단골 초대가수가 되기도 한다.
 

윤수일밴드 5집

 

1985년 5월에는 밴드의 4집 앨범을 발표하여 ‘환상의 섬’을 히트시킨다.
1986년 3월에는 밴드의 5집 앨범을 발표하며 그 유명한 한국적 록음악의 전설 “황홀한 고백”을 히트시키게 된다.
뒤이어 필자가 명절에 주로 듣는 곡인 ‘도시의 천사’까지도 팬들에게 어필하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Tr6XLSrco

 
이렇게 쉼없이 히트곡을 만들어 내는 윤수일은 데뷔곡인 “사랑만은 않겠어요”부터 시작된 1978년 방송사 연말 가요대제전에 1986년까지 양대 방송사 9년 연속으로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쓰게 된다.
TBC는 1978년부터 언론 통폐합 되기 전인 1980년까지 3년 연속 7대 가수상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1987년 4월에 발표된 6집 앨범에는 최진희와 함께 부른 곡인 ‘찻잔의 이별’이 크게 인기를 얻긴 하지만 이후에는 눈의 띄게 그 이름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1988년 ‘아카시아’, 1989년 ‘취하고 싶은 이 밤’, 1993년 ‘외사랑’, 1996년 ‘도시의 이별’ 등의 앨범이 팬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채 묻혀버리게 된다.
 

윤수일밴드 22집


이후 가요계에서 10년 동안은 그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었다.
그동안 사업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곤 했었다.

2006년 그는 오랜만에 신곡앨범을 팬들에게 선사하면서 컴백을 하게 된다.
성인음악으로 변신한 그는 추억의 감성을 자극하는 ‘숲바다 섬마을’로 팬들을 다시 집결시킨다.
2년 뒤인 2008년에도 “터미널”이라는 곡으로 팬들 앞에 다시 서게 된다.
내용이 다분히 추억의 감성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TddVd19TiJc

 
2011년에도 ‘앵무새’, 2014년에도 부산의 노래 ‘부산 여인아’를 발표한 바 있다.

윤수일의 음악은 팬들에게 어필하는 감성을 가지고 있다. 트로트 고고에서 시티 록으로, 다시 감성적인 추억을 선사하는 쪽으로 변화를 해왔다.
팬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음악의 지향점을 읽고 있었다.

그는 현재 60대 후반의 나이이다.
아직도 현직에서 활동 중이다.
팬들에게 다시 열광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다.